레비나스 - 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7월에 들었던 수업에서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 정리를 해 보았는데 제대로 한 건지 싶다.
레비나스 입문서로 볼 수도 있는 책인데, 인간의 본성이나 '관계'에 대한 해석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문학적인 표현들도 마음에 들고.
--------------------------------------------
#1.
"사람들은 실존 앞에서 머뭇거리며 두 발을 질질 끌고 가다가, 가끔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스톱'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탈출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존재 안에 꼼짝없이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존재를 "갈증을 느끼지 않은 채 물을 마시는 것"으로 보았다면, 레비나스는 "존재란 은총이 아니라 무거운 부담"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존재, '있음' 그자체가 "형이상학적 불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존재하지 못할 것("실존의 정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닌 존재 자체("쉬지 않는 존재")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적한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무얼 어떻게 하든 살아있는 한 벗어나지 못하는 것(죽음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는 것),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되는 것, 그래서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존재자에게 부담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살아가면서 종종 느끼는 삶에 대한 '권태'는 레비나스에게 있어 "존재라고 하는 무거운 짐에 대한 반항"이다.
#2.
"사회관계란 자기로부터의 탈출의 기적이다."
그는 나에게 부담을 주는, 혹은 나를 속박하는 '존재', '자기(Self)'에게서 해방될 때 비로소 자유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보존의 욕구가 있다. 레비나스는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그는 '타자'가 자아(I)를 자기(Self)로부터 해방하게끔 ‘명령’한다고 말한다. 즉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타인은 시선이기 이전에 얼굴이다.”
"나는 얼굴을 향해 간다. 그렇지만 얼굴을 흡수할 수는 없다. 얼마나 멋진 무력감인가. 만약 이 무력감이 없다면, 삶은 아무리 엉뚱한 것일지라도 자기를 떠나 자기를 향해 가는 단조로운 여행에 불과할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타자'가 '지옥'이라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이며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은 늘 지옥"이라고 본다. 타인이 자신을 보는 순간 자신은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은 자신의 주체를 빼앗아 가는 반면, 자신을 규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관계'란 주체를 찾기 위한 "의식과 의식의 투쟁"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는 "시선이기 이전에 얼굴"이다. 타자는 규정지을 수 없는, 정의내릴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타자의 얼굴은 시선으로 포착할 수 없는 '벌거벗음'이다. 이 "상처받기 쉬운" 벌거벗음이 우리가 이기적 본성에서 벗어나게끔, '책임'을 지라고 명령하며 요구한다. 즉 레비나스에게 있어 '관계', 즉 “한 사람과의 만남은 한 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경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관계는 언제나 비대칭적이고 이 비대칭적인 관계가 자기 보존의 본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4.
“마치 이웃의 얼굴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철학하라는 명령, 즉 어원을 바꾸어보면, ‘사랑을 현명하게 하라는 명령,’ 다른 사람에게 유일하고 변함없는 얼굴을 부여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끊임없는 이성의 작용으로 저항하라는 명령이 부가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와의 관계, 이 관계는 자기 보존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자기 보존을 뒷전으로 밀어놓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에 우리는 두 가지 행동을 할 수 있다. 비대칭적 관계를 혐오하거나, 혹은 그것을 사랑하거나.
그는 타인의 벌거벗음인 얼굴을 배척하고, 관계를 혐오하는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든다. 또한 레비나스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도 타인과의 관계를 배척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제3자로 만들고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타자가 요구하는 책임을 회피해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관계를 사랑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사랑의 배타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수많은 '얼굴'들이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데, 배타적으로 어느 '얼굴'만을 사랑하게 될 때, 나머지 얼굴에 대한 배척, 즉 책임 회피를 불러온다. 따라서 "얼굴의 복수성"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에 있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지혜』라는 제목처럼, 사랑에는 지혜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philo + sophia)의 어원을 뒤집은 말이기도 하다. 즉 지혜를 사랑하고, 사랑을 지혜롭게 할 때 우리는 존재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