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판된 책으로(독일에선 2년 전에 나왔다고. .), 요즘 고민과 맞닿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성과사회에서 발생하는 피로의 폭력성,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무위의 피로'에 대해.

 

 

 

 "성과사회의 피로는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 뿐이었을 것이다.”

 

  한트케는 이런 말 못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의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자아가 줄어들면서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간다. 자아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고독한 피로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우리는 보고 또 보여진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자아가 줄어들고 이는 세계의 증대로 나타난다. “피로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돌아와 있었다. 이 세상에.”"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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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nes :